어쩌다어른 67회, 설민석의 식史(사)를 합시다
두 번째 식史 - 리뷰(上)
<고조선의 멸망과 고구려 부흥기의 시작>
지난 1월 14일 토요일에 방영한 설민석 선생님의 한국 통사 강의.
지난 7일 방영분, 66회에서는 선사시대를 시작으로 고조선의 탄생까지 알아본 첫 식史였다.
어쩌다어른도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오프닝이 조금 길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게스트 소개 등등 지난한 오프닝 중, 반가운 꿀팁이 있었다.
바로 2017년부터 수능 한국사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계신다는 설민석 선생님.
한국사능력검정 시험을 준비해야하는 나로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수능 한국사와 한국사능력검정 시험과 수업 내용이 다르긴 할텐데...
조금 검토를 해보고 수업이 필요하면 수강을 해봐야겠다.
그래서, 오늘 식史의 주제는?
오늘은 두 번째 식史로, 고조선의 멸망부터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 삼국 시대에 관해 다뤄보는 시간.
(미리 말하지만 두 번째 식史는 시간 관계상, 신라 부분만 잘라서 68회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대인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까지!
단순히 지식 주입을 뛰어넘어,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점,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오늘은 또 어떻게 꼭꼭 씹어서 먹여주실지 기대된다.
지난 강의의 연장선에서...
고조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OK,
그렇다면 고조선은 왜, 어떻게 멸망하였으며 삼국시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 부분은 KBS 팩츄얼드라마 한국사기 1화에서도 잠깐 언급이 된다.
(참고: http://jtalker.tistory.com/25)
설 선생님의 강의와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약 2,000년간 지속되온 고조선은 현재의 강화도부터 북만주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 밑의 삼한과 중국 대륙의 한나라와의 "중계 무역"으로 나라의 부를 축적한다.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강국으로 성장하는 고조선.
이렇게 성장해가는 고조선을 지켜보는 한나라는 당연히 불만이 생긴다.
세상의 중심은 우린데, 저것들이? 게다가 직접 교역하면 고조선에 수수료를 뗄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에 나선다.
한국사기의 내용이 보다 자세하기에 첨언을 하자면, 아래와 같다.
초기에 한나라는 고조선에게 신하의 나라로 삼아줄테니 조공을 바치라
'섭하'라는 사신을 보내 반협박을 하였고, 고조선은 이를 거부했다.
성과를 못이루고 고국으로 돌아가던 사신이, 한 무제의 문책이 두려워
자신을 배웅나온 고조선의 신하를 죽이고 돌아간다.
고조선은 여기서 전쟁을 결심하고, 그 사신을 쫓아가 죽이고야 마는데
전쟁은 여기서 시작된다. 한나라가 무턱대고 고조선으로 쳐들어온게 아니다.
한나라의 침략에 맞서, 고조선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당시에 고조선은 한나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 한다.
(한국사기에서는, 결국 왕검성이 함락 위기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한나라에 투항할 것인가 vs 끝까지 항전할 것인가에 따라 내부 분열이 생긴다.
우거왕은 투항 찬성 세력에 의해서 암살되고, 설쌤 강의에서는 재상 "성기"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는다.
이 역시, 한국사기에서 나온 내용으로...
우거왕 암살 후, 한나라에 투항을 찬성하는 세력들은 한나라로 도주를 한다.
이렇게 전쟁이 종결되는 듯 싶었으나
끝까지 항전을 이어가야한다는 세력 가운데, 재상 "성기"가 주축이 되어
고조선의 남은 백성들과 병력들을 단합시켜 항전을 이어간다.
그러나 한나라 측의 좌장군의 회유에 넘어간 고조선의 왕족 세력들에 의해
성기마저 암살당하고, 항전의 마지막 구심점을 잃어버린 고조선은
그렇게 한나라에 의해 점령당하고, 멸망하게 된다.
아무튼 정리하면
고조선은 한나라와의 전쟁 중, 내부 분열이 발생하여 공격을 막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멸망의 "원인"을 한나라의 침략이라고 해야 할지, 내부 분열이라고 해야 할지는
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내 생각은, 한나라의 침략은 외적 요인으로써 고조선은 이를 피할 수 없었으나,
내부 분열은 고조선 자체로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직접적인 멸망 원인은 "내부 분열"이다.
이렇게 피할 수도 있는 "내적인 문제"로 인하여 망국의 길을 걷는 역사는
앞으로 다룰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반복된다.
이 부분은 한국사기를 통해 더욱 자세히 다룰 수 있을 듯하다.
그렇게 고조선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모두에게 친숙한 "삼국시대"
그러나 실제로 국가 수로만 따지면, 이 당시는 삼국이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외에 "가야"도 있었다. 그럼 왜 "사국시대"라고 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한국사를 벗어나, 세계사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세계사 관점에서 이 시기를 "고대 국가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고대 국가에는 4가지 성립 조건이 있었고,
일부 조건은 맞추긴 했으나, 가야는 정치적으로 단합하지 못하고 6개로 쪼개져 있었다.
이로 인해서 "고대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국시대라고만 불리운다.
삼국 중, 첫 챕터는 "고구려"다.
삼국을 다루는 방법은 대체로... 그 나라만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고
전성기는 누가, 어떻게 맞이하였는지를 살펴보는 큰 흐름을 갖는다.
그 맥락에서 고구려 안에서도 3가지 챕터로 나눠진다.
1. 지리적 특성
2. 문화적 특성
3. 전성기 원인
첫 번째, 고구려가 왜 영토 확장이 필요했는지를 지리적 특성을 통해 알아보자.
고구려는 부여에서 도망친 주몽이 "졸본"지역으로 내려와서 오녀산성을 쌓고 건국을 한다.
문제는 이 지역이 대부분 "산지"라는 것.
당연히... 농사를 지을 만한 평지, 농토가 부족하여 대부분 사람들이 빈곤했다.
그렇기 때문에 옥저, 동예 등 다른 나라의 식량을 빼앗거나,
힘으로 제압하여 조공을 받는 약탈경제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번재, 고구려의 문화적 특성 중 "결혼 제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고구려는 대체로 중매보다는 연애결혼 문화가 성행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구애를 하면, 여성 쪽 부모의 허락을 통해 결혼을 하는데
여기까지는 현재와 크게 다름 없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을 하면 서로 간에 예물(재산)을 주고 받지만,
이 당시에는 예물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뭐 이것을... 현재와 비교해서
"고구려 사람들은 사랑을 중요시 여기는 상남자, 로맨티스트였다!" 라고 농담삼아 얘기하는데
그렇게 단순히 볼 문제는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신랑 측으로부터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은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화폐가 통용되기 전이었고, 농사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토지도 많아봤자 무용지물이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부의 기준은? 바로 "노동력"
바로 그랬기 때문에 결혼을 할 때 예물, 재물 교환이 아닌
노동력 교환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제도화 된 것이 바로 "서옥제"다.
정리하면, 지금의 "예물 교환"이 없었기 때문에
현 시대보다 고구려인들이 더 로맨틱하고 사랑을 중시했다고 볼 게 아니다.
당시 사회적, 문화적으로 공동체가 "재산"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고구려 인들은 물질적인 것(화폐)을 "재산"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력"을 재산으로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가족으로 취하는 대신에,
남성은 여성의 가족(장인/장모)과 함께 살며 "노동력"이라는 "재산"을 기증했다.
이런 문화적 행태를 제도화하여 해석 한 것이 "서옥제"다.
따라서, 결혼을 통해 아무런 재산 교환이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로맨틱하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결혼을 통한 재산의 교환"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공동체, 사회가 노동력을 재산으로 인정한다는 동일한 맥락 아래서
또 하나의 재미있는 문화적 행태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형사취수제"
지금 관점에서 단순히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는 것이 미친 소리일런지 모르지만,
그만큼 재산을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고 그 본질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재산"이 무엇인지 공동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부분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현 시대에 와서도 세금과 복지, 사회 정의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롤스의 <정의론>, 로크의 자유지상주의와도 관련된...)
고구려의 세 번째 챕터, 고구려 전성기의 원동력(원인)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도 한국사기 1화 내용이 조금 나온다.
기본적으로 백제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아들, 온조가 건국한 나라다.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의 아들 격인데, 세월이 흘러... 고구려의 16대 왕 고국원왕은
백제의 13대 왕 근초고왕에게 침략을 받아, 죽게 된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당연히 열 받을 수밖에 없었겠다.
고국원왕의 죽음 이후, 소수림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소수림왕은 흉년 등 전쟁이 어려운 상황을 직시하며, 바로 백제와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더 멀리 보고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 불교 수용
2. 율령 반포
3. 태학 설립
불교를 통해 국민들의 멘탈을 케어하고 국론을 통일한다.
율령(법)을 제정, 반포하여 나라의 기틀을 단단히 한다.
그리고 교육에 힘써 인재를 양성한다.
역사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에 앞서 기틀을 닦는 왕은 늘 있어 왔다. (ex. 태종 → 세종)
소수림왕은 위의 3가지 정책을 통해 광개토대왕, 장수왕이 펼칠 고구려 전성기의 기반을 탄탄하게 완성했다.
광개토대왕은 강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만주 벌판을 평정하고, 백제의 왕을 "노객"으로 칭하며 굴복시킨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넓은 영토 개척/정벌"이다.
그럼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겠다. "넓은 영토가 그렇게 칭찬할 정도로 좋은거야?"
설민석 선생님은 이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넓어진 영토만큼 백성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그만큼 국가가 신경써야할 요소가 많다는 것.
넓은 영토는 국가에게 "부담"일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영토의 대부분이 산지였던 고구려에게는 "소금"이 귀했다.
여기서 광개토대왕 업적의 포인트는 단순히 넓은 영토를 얻기 위해서
무차별적인 정복전쟁, 땅따먹기를 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지역을 위주로 세력을 확장하다보니
땅이 넓어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① 넓은 영토는 국가에게도 부담이다. → ② 근데 광개토대왕은 왜 이렇게 영토 확장을 했나?
→ ③ 무작정 땅따먹기를 한게 아니라 실익을 위한 정복이었다. → ④ 광개토대왕은 위대하다.
대략 이런 논리인데, 땅따먹기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 때문에 굳이 첫 번째 전제를 깔고
세 번째 논리를 펼치면서까지, 돌려서 광개토대왕을 미화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후대의 장수왕이 그의 업적을 기리고 "태왕"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으니
영토 확장이라는 업적 외에도 그는 이미 여러모로 위대한 성군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많은 영토와 국가 점령은 곧 더 많은 백성으로 이어지고
그에 따른 통치 및 복지 지출에 대한 부담이 생기는 것 역시 당연하겠으나...
이 당시 재산의 기준은 "노동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 많은 영토는 부담이 아니라, 더 많은 노동력. 즉 더 많은 재산을 뜻한다.
그리고 더 많은 노동력에서 오는 이익은 부담을 압도한다.
각 삼국의 가장 넓은 영토를 갖는 시절이 최대 부흥기라는 점은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영토는 곧 재산이며, 고대 국가에게 넓은 영토만큼 위대한 업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영토 확장 욕구도 이와 같은 논리라고 볼 수 있다.
잡설이 끼니 내용이 많아지는군 이번주 토요일에 세 번째 식史가 예정되어 있다.
그 전에 마저 두 번째 식史 리뷰를 마치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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