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남한산성, 영화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BlueBurner 2017. 10. 6. 03:51

남한산성, 영화의 함정에 빠지지 말자!


 화려한 캐스팅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고, 평론가들 평가도 좋았기 때문에 어떤 영화인지 궁금했었다. 연휴를 맞이해서 오랜만에 등산을 좀 했는데,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피곤함을 무릅쓰고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는 역사 고증에 충실한 사극이었다. 배경인 병자호란 시의 조선 내, 외 갈등 상황을 짧지않은 러닝 타임을 활용해서 꽤 담백하게 뽑아냈다. 갈등 상황이란 외적으로는 조선과 후금과의 갈등. 내적으로는 척화파와 주화파. 그리고 백성과 조정(벼슬아치). 그 중에서도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의 갈등 상황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다. 후금의 요구를 받아들여 항복하고 아버지의 나라로 섬길 것이냐, 끝까지 맞서 싸우면서 명과의 신의를 지킬 것이냐.

[첫 번째 함정. 김상헌은 악이고 최명길도 선이다?]

 사실 이것은 윤리철학에서도 계속 부딪혀온 의무론, 목적론 사이의 갈등과도 궤를 같이 한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당위로서 지켜야한다는 척화파는 의무론적 윤리관, 명나라의 의리를 따지다가 다 죽게 생겼으니 일단은 청을 구슬리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는 목적론적 윤리관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런 주제를 보고 둘 중 어느 것은 옳고 어느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수 많은 사대부들이 척화파의 주장에 찬성하는 모습을 여러 컷으로 보여주지만, 주화파의 주장에 찬성하는 사대부는 누구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오롯이 최명길 한 사람의 굳은 의지로만 묘사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홀로" 향하며 협상을 시도하고 고뇌하며 다른 신하들과 대비되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옳다" 라는 식의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다. 척화파와 대등하게 논쟁하고, 결국 주화파가 이겼듯이... 화친을 주장한 사람은 최명길이 주축이 됐을뿐 사실은 혼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혈혈단신, 상대적 약자로 묘사하며 이것이 마치 "선"인양 그려낸다. 이건 아무리 봐도 함정이다.

 백성의 목숨과 삶이 중요한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김상헌 역시 백성의 목숨과 삶은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날쇠"의 요청을 귀담아 듣고 가마니를 나눠주도록 조치한 것과 "나루"에게 떡국을 주는 일련의 장면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단지 영화 시작 부분, 후금의 병사들에게 얼음길을 알려주겠다는 노인(나루의 할아버지)을 죽인 장면에 빠져서 "백성의 삶을 중히 여기지 않는 척화파는 악이다"라고 단정해버리는 영화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되겠다.

[두 번째 함정. 인조와 같은 무능한 리더는 필요없다?]

 절대적으로 척화는 옳지 않고, 주화가 옳으며 인조는 무능한 임금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척화와 주화의 논쟁은 거창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지극히 단순한 선택의 문제다. 그 당시의 의사 결정권은 절대적으로 "왕"에게 있었고, 나라의 소유주도 "왕"으로 정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 서서 충분히 고뇌하고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워 했다면,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 역사의 심판을 기다릴줄 알았다면 인조를 무능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극에서의 의사 결정은 "왕"이라는 인물 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런 사극들은 우리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중요하게 고민하게끔 만든다. 병조판서의 이상한 말에 넘어가 충직한 이시백 장군에게 곤장형을 내리는 왕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로 도망쳤다는 점을 기반으로 우리는 인조가 우유부단하고 사리분별을 못하며 무능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바람직한 리더란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고, 강단이 있으며 아랫 사람들의 의중을 모두 파악하고 때로는 휘어잡을 줄도 아는 리더"라는 담론을 형성한다. 이런 요건들은 모두 훌륭한 리더로서 필요한 자질이긴 하지만 이런 자질이 있다고 반드시 훌륭한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똑똑하고 카리스마 있고 강단이 있고... 그렇지 않았나?

 과거 왕정 체제에서는 왕이라는 한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 모든게 좌지우지 되기 때문에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누가 통치하던, 잘못된 결정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성인 군자가 통치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성인 군자는 대통령 후보가 되기도, 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매우 힘든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성인 군자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모든 결정은 혼자 내릴 수 없다. 당연히 그가 내리는 모두에게 이로운 정책들은 실현되지 않거나, 매무 더딘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선을 행하는 것도 방해한다"는 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그러나 이 단점은 "악을 행하는 것을 최소화 한다"는 장점으로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지금 당장 선이 행해지지 않고 바뀌지 않는다고 답답해하기 보다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기뻐하며 다양한 이슈들의 개별적인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 조망할 줄 알아야겠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렵다. 이 두 전제만 놓고 생각해본다면... 일단 살아 남아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장을 하며 자신의 주군이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최명길 삶이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할복한 김상헌의 삶보다 조금은 더 본능적이고...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우니까. 하기사... 최명길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화친해야한다는 간언을 했다는 점에서 마냥 무엇이 더 쉬운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최명길]
1. 항복하자 → 항복했다 → 삶 지속(with 비난 but 항복하자는 주장으로 모두를 구함)
2. 항복하자 → 싸웠다 → 이겼다 → 삶 지속(with 비난 of 비난)
3. 항복하자 → 싸웠다 → 졌다 → 죽음
4. 항복하자 → 싸웠다 → 혼자 항복 → 삶 지속(with 비난 + 죄책감)

[김상헌]
1. 싸우자 → 싸웠다 → 이긴다 → 삶 지속(+다수를 죽음으로 내몬
죄책감)
2. 싸우자 → 싸웠다 → 졌다 → 죽음(+다수를 죽음으로 내몬 죄책감)
3. 싸우자 → 항복했다 → 죽음

 너무 단순화하긴 했지만... 이렇게 보면 최명길의 삶은 비록 죽음을 면했을지라도 평생 남은 삶을 비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더 어려운 선택일 수도 있겠다. 반면에 김상헌의 삶은 비교적 심플하다. 진짜 핵심은 "죽기 보다 싫은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 일지 모르겠다.

최명길은 전쟁과 항전으로, 설령 이긴다고 할지라도 백성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삶을 지속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진짜 결국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싫음 이구나.

 둘 중에 어떤 삶이 좋은지, 나 자신은 둘 중 어떤 방식으로 살아오고 있었는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난 김상헌의 삶이 조금 더 마음에 들며 그렇게 살아오려 노력했었다. 가령 무단 횡단을 하면 안된다. 이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차가 한대도 안보이더라도, 무단 횡단은 일단 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놓고... 고민 끝에 그래도 한대도 없으니 건너볼까? 라고 생각하며 사는 삶. 계속해서 노력중이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