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기 두번째 에피소드, "최초의 문명" 먹는 문제를 해결하다.
한국사기 두번째 에피소드 "최초의 문명".
구석기 시대에 지능과 사회성이 고도로 발달했던 인류 "호모 사피엔스".
지능은 그들을 적은 힘을 쓰고도 많은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효율성"을 갖도록 해줬고, 지능을 발판삼아 언어 능력도 발달하여 다른 종족에 비해 대규모의 집단을 갖고, 지휘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장점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떤 종족보다도 강하게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줬다.
그러나 이 시대는 아직 빙기와 간빙기가 반복되던 시기로, 아무리 지능과 사회성이 발달했어도 수렵과 채집에 의존했던 인류는 빙기가 지속되면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리의 대부분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먹고 산다는 것"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땅 위에 수렵할 동물은 남아있지 않았고, 채집할 식물 역시 남아있지 않았다. 인류는 그래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귀속에 뼈가 자라는 요즘 해녀들에게서 나타나는 질환의 흔적을 이 시대의 유골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인류는 바다 속에서 어패류를 채집하면서 육지의 식량을 대체했다. 그러나 많은 무리들이 풍족하게 먹을 순 없었고, 바다 속에서도 사냥을 시작하는데 메인 타겟은 "고래"였다. 바다를 거닐던 거대한 단백질. 고래를 발견한 인류는 고래를 사냥하기 위해서 지능을 발휘하여, 잠수에 그치지 않고 먼 바다로 나가서 사냥을 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들었다.
목재 내부의 벌레를 제거하고 석기로 파내기 쉽도록 숯을 활용하여 통나무를 깎아 카누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배를 활용해서 드디어 여러 사람이 함께 바다로 나갈 수 있었고, 결국 조직적으로 고래를 사냥할 수 있었다. 고래는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있는 주요 식량원으로, 빙기에도 무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는 자연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자연은 변덕이 심했다. 고래는 항상 같은 곳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고래가 없으면 빙기에서 생존이 여전히 어려웠고, 인류는 다시 한번 자연의 축복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를 했다. 기도는 누가 가장 열심히 했을까? 무리의 생존에 책임을 지는 족장, 촌장이었다. 아마 당장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 것 같은 판국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했고, 책임에 가장 가까운 촌장은 그게 기도든 무엇이든 가장 열심히 해야만 했다. 촌장은 본인의 절실함을 구성원 모두와 자연이 알아주길 바랬고, 그것이 화려한 장신구로 발전할 수 있었던 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구성원 역시 촌장을 따라 열심히 기도밖에 할 게 없었고, 기도는 제사로 의식의 규모가 커졌다.
무리 생활 중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숨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본능이었고 죽음 이후의 세계,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역시 인간의 본능이었던 듯 싶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땅에 묻는데, 묻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 흥미롭다. 어떻게 죽었는지, 생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서 매장 방식이 다르지 않았나 추정된다고 한다. 마치 권력자의 죽음은 고인돌로 장식하였듯이.
기도를 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류는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으로 "저장"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간빙기에 최대한 많은 식량을 채집하고 저장하려 했다. 가장 쉽고, 많이 채집할 수 있으며 오랜 기간 효율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식량으로 인류는 견과류, 즉 "도토리"에 주목했다.
저장 방식에 있어서도 지혜를 발휘하는데, 도토리의 떫은 맛은 제거하기 위해서 물에 담가 저장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또 조수 간만에 차를 이용해서 저절로 물에 담가졌다, 건져졌다 할 수 있도록 해안가의 땅을 파서 도토리를 매립했다. 바다에 쓸려나가지 않도록 나무와 줄기를 이용해 덮개도 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채집과 저장만으로도 점점 늘어나는 무리를 먹여 살리기에는 한계는 있었고, 인류는 더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원했고, 드디어 "농사"가 시작됐다. 이제 인류는 잡거나 줍는 것이 아니라 기르는 것. 즉 자연을 극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땅에서 자라는 곡식들은 이들에게 새로운 고래가 됐다.
해양에서의 고래 잡이, 내륙에서의 수렵과 채집 그리고 농사가 시작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 잉여 생산물이 있으니 매번 식략을 찾아서 옮겨서 생활할 필요가 없었고, 누군가 더 많은 식량을 갖고 있으면 이것을 나눠주면서 대가를 받았다. 자본에 의한 사회 계급화가 시작된 것이다. 식량으로서의 효율이 뛰어난 "벼"를 재배하면서부터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사회 전문화가 이루어지며 다양한 직업, 문화,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교역은 농업 혁명에서 비롯된 변화의 한 가지다. 잉여 생산물로 내게 없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시장이 생성된 것이다. 이 당시 시장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은 "흑요석"이었다. 흑요석은 화산 폭발로 흘러나온 용암이 식으면서 생성되는 암석 조각인데, 한반도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한반도 산이 아니었다.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일본 대륙에서 흑요석이 많이 났는데, 한반도에서 발견했던 흑요석의 성분과 일치했다. 그리고 일본의 쓰시마섬에서 수 많은 조개 팔찌, 고라니 이빨로 만든 장식 등이 출토됐는데 투박 조개와 고라니는 일본에서 서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건너 갔었고, 수시로 교역을 해왔다는 것을 추정 할 수 있다. 아마 지금과 해수면의 높이가 달랐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바다 건너 일본 대륙이나 섬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건너갈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의 "문명"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풍요로움을 배경으로 더욱 커진 무리와 집단은 "국가"로 발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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