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어른 68회, 설민석의 식史를 합시다 - 세 번째 식史 리뷰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신라의 삼국통일
눈 때문에 묵혀둔 어쩌다어른 - 설민석편 리뷰... 이번 68회, 세번째 식史는 고구려와 백제에 이어 "신라"의 역사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쾌거를 이루지만 삼국 가운데 발전이 가장 늦었고, 전성기도 가장 늦게 맞이했다. 발전이 가장 늦었던 원인은 지리적인 특성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하여 바다 쪽으로는 나가봐야 일본, 태평양을 맞대고 있었고 육지 쪽으로는 소백산맥에 1차, 백제와 고구려에 2차로 가로막혀 중국의 신문물 유입도 가장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리적 특성으로 문물을 받아들이고, 발전하는 속도가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신라는 내부적으로도 아주 폐쇄적인 신분제도인 "골품제"라는 모순을 갖고 있었다. 육두품 출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진골이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진골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골이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심지어 입을 수 있는 옷까지 입을 수가 없었으니,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버금가는 폐쇄적인 신분제도였던 듯 하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발전도 늦었고, 폐쇄적인 사회구조였던 신라는 어떻게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가? 삼국 통일의 원천으로 "외교"와 "교육" 두 가지 포인트를 뽑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은 신라 통일에 주축을 이룬 인물들은 주로 진골 출신인데, 이들은 신분제도에 가로막혀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고 기지를 발휘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설민석 선생님은 이를 통해서 '노오오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식으로 교훈을 전달해주시는데, 골품제는 문제가 있는 제도였고 그 위인들은 물론 총명하고 뛰어났겠지만, 운이 좋았던 것으로 봐야 한다. 잘못된 구조 하에선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전제 없이, 노력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신라는 어떻게 통일을 했나? 신라의 전성기는 6세기 "진흥왕" 시기였는데, 초기 진흥왕은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가 갖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했다. 원래 약속은 서로 한강 상류와 하류를 나눠 갖기로 했지만, 진흥왕은 백제를 배신하고 공격하여 한강 상류와 하류를 모두 차지하고 신라의 전성기를 이룬다.
이후 신라는 성골에서 남자가 없어, 최초로 여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그녀가 바로 드라마로 유명한... 선덕여왕(7세기)이다. 그리고 배신당한 백제는 바로 고구려와 여제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한다. 이 당시 백제의 왕은 "성왕" 이었는데, 신라의 배신에 격노하여 눈이 돌아가버린 성왕은 상황파악을 못한채 무턱대고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는 보란듯이 성왕을 처치한다. 이후 의자왕이 즉위하고, 초기에 전투 능력이 좋았던 의자왕은 신라를 가열차게 공격한다.
점차 여제동맹에 밀리자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 회유하려 하지만 한강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어 협상을 결렬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신라는 당나라의 문을 두드린다. 이렇게 나당동맹이 체결된다. 나당 연합군은 강성했던 고구려 대신 백제를 먼저 공격하여 황산벌 전투에 승리하면서 백제를 수복한다. 그리고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세 아들 간 분열이 일어나면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망하면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문제는... 삼국 통일을 하고나니 당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대동강 쪽의 땅을 주지 않으면서 신라까지 넘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당나라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싸울 것인가. 신라는 화백회의를 거쳐서 당나라 역시 힘이 빠졌으리라 판단하고 후자를 선택한다. 나당 전쟁의 시작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통일 신라를 이룩한 역사는 KBS1 한국사기 프롤로그에 나왔던 문무왕의 이야기와 시대가 일치한다.
2017/01/16 - [진지한 리뷰/방송] - 한국사기, 1화(프롤로그) 우리는 누구인가
왜 우리는 신라의 통일을 비판하는가? 왜 대한민국의 외교는 비판받는가?
살펴봤듯이 신라는 여제동맹을 먼저 깨고 한강을 차지하고 전성기를 맞이했고,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 것도 모자라 당나라와 싸울 땐 본인들이 멸망시켰던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런 역사를 배울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신라가 "비겁하다", "얍삽하다"라고 평가를 너무 쉽게 내리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신라의 역사가 비겁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신라에겐 우리에게 익히 유명한 말을 인용할 수 있겠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물론 당나라를 끌어들이고, 고구려의 영토를 유실한채 이룩한 삼국 통일은 그 자체에 한계는 있었지만,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국가의 안위, 생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신라의 입장에선 불가피한 신의 한 수였다. 지금 사드 배치 문제로 외교적 문제에 봉착한 우리는 신라의 외교로부터 무엇이 좋은 외교인지를 배워 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는 무조건적으로 사드배치를 찬성하며 국가 안보를 탄탄히 다져야 한다고 한다. 누구는 중국의 경제 압박을 고려하면 사드배치는 경제적인 이유로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얼마전 썰전에서 유승민 의원을 검증하면서 유시민 작가가 얘기했듯이, 사드배치 이슈 속에서 '안보'와 '경제' 이 두 가지 가치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유도하는게 '외교'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중국의 불만을 줄이고 미국을 안심시킬 수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의 외교는 많은 비판을 계속 받아오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신라의 역사를 '비겁'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사고를 기본값으로 설정해버린, 기본적으로 내재돼있는 국민적 의식이 발단이라고 생각한다. 이 국민 의식의 기원은 조선의 사대부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시대에는 명나라냐, 금나라냐 등등 우리는 항상 이익보단 "명분"이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었다. 비단 외교 뿐만이 아니라 예송논쟁 등등 국가 운영의 원리 자체가 성리학, 명분, 체면 등에 의해 돌아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런 역사에 의해 내재된 국민적 의식으로부터, 지금의 우리 이권은 못챙기고 강대국의 눈치만 보는 외교적 문제들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외교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언제나 비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대외적인 정세에 의해 주변국의 눈치를 살피며 손해가 불가피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외적인 변수는 차치하고서라도 매번 정권이 외교 정책의 방향을 선택하고 추진할때마다, 내부적으로 국론을 통일하지 못한채 서로 물어 뜯고, 싸우는 것을 보고 있자면 분명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앞서 말한 외교적인 결정을 내리는 프로세스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실리보단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국민적 의식이다. 두 번째. 외교적인 정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의 대화/논의 부족. 세 번째. 선택한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명분에 대한 충분한 설명/대화/이해 부족. 과거와 달리 정권의 정당성이 국민으로부터 발현되고, 국가의 외교 정책을 실시간으로 국민들이 확인하고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상황에선 본인들이 외교의 방향을 '선택'하고 '추진'하는 과정에 대해서 민주적인 대화가 필요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이런 두 번째, 세 번째 문제 원인도 첫 번째 문제처럼 역사적인 맥락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근현대사는 마치 폭풍과 같아서 그 속에서 뭐가 성장하는지, 꿈틀대는지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우리의 자주 의식이 발현되려는 찰나, 강제적으로 맞이한 일제강점기 해방. 독립이 뭔지도 모르고 맞이한 한국전쟁. 이로 인해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과정에서 우리 마음 한켠에는 패배주의가 남았고, 자주의식 역시 제대로 싹 틔우지 못했다. 그리고 전쟁 과정에서도 외세의 힘을 빌리고, 냉전 체제 속에서 남한 정부 수립 역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힘을 빌려야 했던 어려운 상황. 전쟁 후 피폐한 경제 상황 극복을 명분으로 탄생한, 만들어진 군부독재체제. 독재를 극복하기 위한 민주화 운동으로 자주의식을 드디어 싹 틔우는가 싶었지만 처음에 영양공급이 제대로 안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속성으로 싹이 성장했는지... 우리의 민주주의 처음부터 시들시들하는가 싶더니, 아직까지도 비실비실... 제대로 꽃을 못 피우는 듯 하다.
국가, 권력자는 외교를 포함한 국가의 의사를 결정, 선택하는 과정에서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 대화해야할지 모른다. 국민들 역시 국가가 대화를 걸어오는 것이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익숙하지 않다.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진보적인 정권이나 국가의 선택을 납득하지 못하고 대화를 요구하는 국민은 왜인지 나쁘게만 보이고, 빨갱이로 보인다. 어찌저찌 의사결정 후에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모든 국가적인 선택과 결정, 그리고 과정에 대한 평가는 좋거나 혹은 싫거나 양분화되어 첨예한 갈등이 지속된다. 격렬하게 펀치를 날리는 복서는 쉽게 지친다. 국가와 국민 모두 의욕을 상실하고 관심이 식어간다. 정책은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든지 말든지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싸움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와 토론, 논쟁은 민주주의에 꼭 필요하다. 하지만 싸우는 방식, 과정에 있어서 국가와 국민 모두 서로를 이해하려는 이성적인 사실 판단보다 감정적인 가치 판단을 앞세우면서 좋은 것 혹은 싫은 것으로 양분되어 서로를 이해하려는 반성과 노력없이 싸우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에 우리가 미국처럼 자주적으로 독립하고, 프랑스처럼 단두대에서 왕정시대의 종말을 두 눈으로 보고,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나치 잔당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심판했다면? "아, 국민의 힘이 모이면 뭔가 되는구나.", "정당하지 않은 권력은 심판받는구나." 는 식의 건강한 자주의식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민주주의 아래에서 사드배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으로 요즘의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는 불완전하게 탄생한 민주주의가 천민민주주의로 타락하면서 불궈진 문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시대 이후 역대급으로 비민주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제서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워나가고 있다는 것 같다. 국민도 국가도 함께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모두가 반성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즉 '관용'이 무엇인지 깨닫고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통일 신라의 흥망성쇠
통일신라 이후에 발해와 병존한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까지의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이 때의 역사를 포함해서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돼있던 기간은 약 300년이다. 이 당시 분단 상황은 지금 우리의 분단 상황과 비슷하다는데, 과연 우리는 이 시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발해와 통일 신라 중 남국(통일 신라)의 흥망성쇠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의 시발점이자, 통일 신라의 "흥"은 근원은 신라의 "태종무열왕(김춘추)"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무열왕을 옆에서 도와,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된 장군은 "김유신"이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우리는 무열왕과 김유신 두 인물 모두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이라는 점을 주목해볼만 하다. 김춘추는 원래 왕족인 성골이었는데, 조상인 진지왕이 능력 부족으로 폐위를 당하자 집안 전체가 진골로 강등당한 반은 진골, 반은 성골인 인물이었고 김유신은 신라로 귀화해서 진골로 인정받은 가야의 왕족 후예였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으로 시대가 흐르면서 성골 중에서는 왕위에 오르기에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뛰어난 정치적, 외교적인 능력을 보여주던 김춘추가 화백들에게 주목받고, 그의 속에 흐르는 진골의 피를 명분으로 삼아 유력한 왕 후보로 거듭나게 된다. 김유신은 이러한 상황을 정확히 읽고, 기지를 발휘해 김춘추와 자신의 여동생(김문희)의 혼사를 성사키며 김춘추와 한 배를 타게 된다.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룬 명콤비의 탄생이다.
삼국 통일의 시작은 태종무열왕이었지만,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마무리는 맺었다. 문무왕은 무열왕과 김문희 사이에서 난 아들로, 문과 무를 모두 갖춘 뛰어난 성군이었다. 통일 신라를 완성한 문무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후대를 맡기는데, 이 아들이 그 유명한 "신문왕"이 되겠다.
문무왕으로부터 통일 신라를 물려받은 신문왕은 집권 초기에 김흠돌의 난을 겪고, 이를 제압함으로써 왕권 강화의 명분을 얻게 됐다. 중앙 군사 조직으로 9서당이라는 국왕 직속 부대를 설치하고, 진골 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6두품 등용 정책으로 왕권을 매우매우매우 강화시킨다. 그리고 신문왕은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세종대왕 못지 않은 업적을 세우게 된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국가의 발전은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한 영토 확장 및 관리와 교육 정책으로부터 꽃 피우고 애민 정신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듯 하다. 신문왕도 마찬가지였다. 국학이라는 이름의 신라의 국립대학을 만들어 6두품까지 배울 수 있게 하였고, 인재 채용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리고 넓어진 영토는 9주로 재편하여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평등하게 대하여 각각 3주 씩 나눠 갖도록 하고, 자신의 호위 군사를 채용할 때도 고구려, 백제, 신라인 모두 차별없이 등용함으로써 기존에 골품제로 폐쇄적이고 내부적으로 모순을 갖고 있던 신라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신문왕의 훌륭한 통치는 많은 이야기와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 중 유명한 것으로 "만파식적"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신문왕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자신에 물려준 아버지, 문무왕을 깊이 존경하고 자신이 통치를 하면서도 제사를 통해 기리면서 위로를 받고자 했었다. 거기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어느 날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관측하고 기상관을 통해 점을 쳐본 신문왕은 괴이한 보고를 받게 된다. "선왕께서 용왕이 되고, 김유신 공은 천신이 되어 선물을 주려는 듯 합니다." 그래서 직접 탐사를 나선 신문왕은 용을 만나고, 그에게 점을 쳐본 결과와 같은 이야기를 듣고 대나무를 선물 받는다. 바로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만파식적인데, 이 피리를 불 때마다 반란이며, 폭풍우며 온갖 환난이 저절로 극복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파식적을 통해 우리는 신문왕이 얼마나 왕권 강화와 정세 안정을 원했는지를 추정해볼 뿐이다.
신문왕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 통일 신라는 전성기 답게 문화가 꽃을 피운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불과 작년에 방문해서 구경을 했었는데, 그것들이 통일 신라.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었다. 신라의 재상이었던 김대성은 원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큰일을 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게 해달라며 부처님께 시주를 함으로써 윤회하여 부유한 집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전생의 부모까지 함께 섬기게 된다. 현생의 부모를 기리기 위해 불국사를 짓고, 현생의 부모를 만나게 해준 전생의 부모를 기리기 위해서는 석굴암을 지었다고 하니... 그 높은 산에 그런 굴을 파서 조각을 넣어놓은 기이한 일만큼이나 유래가 기이하다. 부처님의 이상 세계를 건축물로 구현했다는 불국사의 다리와 건물 등 구조가 갖는 의미를 알고나니 그곳에 다녀왔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새삼 유적지에 감탄하게 된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어디든 여행을 떠나고 무언가 견학을 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보도록 하자.
통일 신라는 그렇게 문화를 꽃피웠지만, 여느 역사와 다름 없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여느 역사와 다름이 없다는 것은 기득권층의 향락과 타락 그리고 무능에서 망국이 촉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국가의 정치 상황은 어떤 문화가 융성하는지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시에는 기득권 내에서 다양한 향락과 유흥 문화가 꽃피운다. 술을 물에 띄워서 돌려 먹는 포석정과 왕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놀이로 목제주령구까지 만들어 놀게 된다. 이 당시 집권자는 "진성여왕"이었는데, 여느 왕과 마찬가지로 집권 초기에는 정상적이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타락하여 젊은 미소년을 곁에 두고 향락에 빠졌다고 한다. 기득권이 사치와 향락은 엄청난 빈부격차, 양극화를 낳았고 빈번한 봉기와 반란으로 인해 통일 신라의 역사는 끝맺는다.
통일 신라의 무너짐을 보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더 이상 신라를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나라를 재건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후삼국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69화에서는 발해의 흥망성쇠와 후삼국시대 초반을 다루게 될 듯 하다. 빨리 봐야지...
'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회조사분석사 2급, 필답형/작업형 독학 합격 후기 (0) | 2017.12.31 |
---|---|
사회조사분석사 2급 필기시험 독학으로 합격하기. (0) | 2017.05.08 |
한국사기 두번째 에피소드, "최초의 문명" 먹는 문제를 해결하다. (0) | 2017.02.11 |
한국사기 첫 에피소드, "인간의 조건" 지능과 사회성 (0) | 2017.01.24 |
어쩌다어른 67회, 설민석의 식史를 합시다 - 두 번째 식史 리뷰(下) (0) | 2017.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