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유감

동성애에 대한 단상.

BlueBurner 2018. 1. 24. 12:11

까칠남녀에서 동성애자들이 출연했고, 폐지까지 논의가 될 정도로 뜨거운 이슈가 됐다.

명색의 교육방송에서 아이들에게 동성애라는 이상한 개념(?)을 학습시킨다, 악영향(?)을 끼친다는 학부모들의 반대 주장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약자를 우선으로 하는 정의관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거나 그 동안 소외되고 배척되어 왔던 집단에 대한 기득권의 폭력을 그 배경을 "무지"로 판단하고 "악"으로 상정하여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번 논란도 마찬가지다. 학부모들이 동성애자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고, 다양성이란 개념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무식하고, 꼰대라서 격렬히 반대한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은 듯 하다.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자기 나름의 판단을 할 때, 그 사안에 대해서 100%, 모든 것을 다 알고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경험과 갖고 있는 지식의 단면을 활용해 현상을 보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무조건 옳고, 자신의 판단에 반하는 사람은 나보다 현상에 대해서 덜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은 오만이다. 실제로 세상의 모든 현상에 100% 옳고, 100% 옳지 않은 현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린 세상의 복잡성을 먼저 이해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식 수준에 대해 걸고 넘어지면 건강한 대화가 진전될 수 없다.

나의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로서 어떤 조건에서든 "개인"은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은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의 성 선택이 불쾌하고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피해"라고 느낀다는 점인데 이 부분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1. 동성애자들의 성 선택을 불쾌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성애자 그 자신의 문제다. 단지 불쾌하다며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왜 불쾌하다고 받아들이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성 선택, 사랑의 양상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 편협함 때문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에 나이도, 국경도, 인종도 없다면 성별도 없을 수 있다.

2.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내보냄으로써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주장은 두려움에 기반한다. 그 두려움이란 자녀를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키우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의 두려움이다. 이것은 출산과 양육이라는 부모의 책임이 무엇인가에 대한 오해로 대단히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이다. 자녀의 출생을 부모가 선택했다면, 출생 이후에는 자녀의 선택을 최대한 지원해줘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으로 끌어들인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오도록 강제하였기 때문에 그 이후의 자녀의 선택에 대해서 지원해주는 것. 그것이 양육이자 진정한 부모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제한적인 지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녀 역시 자신의 선택은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내 자녀가 성장 과정에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자녀의 선택에 따른 여러 우연과 필연의 반복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단순히 "방송"이라는 하나의 원인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인생이 걸린 결과를 도출하진 않는다. 역사가 그렇듯이 개인의 역사성에 있어서도 이런 우연과 필연들을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성애자들의 비판을 "무식해서 그렇다"는 비난으로 매도해서는 갈등만 심화될 뿐이다. 원래 세상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수많은 역사가 증명해 왔다. 침착하고 차분하게 반론하면서 이해시키려 하지말고,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3. 동성애자들은 출산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선 많은 고민을 해봤다. 너무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동성애자는 왜 생기는 것일까? 생각을 해봤다.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봤다. 우선 사랑은 남성과 여성간에 이뤄지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동성 친구들도 사랑하고, 가족들도 사랑한다. 심지어는 애완동물도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기도 한다. 성적인 교감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상적인지 비정상적인지를 떠나서 이성, 동성, 가족, 애완동물 심지어 인형이랑도 성교를 하기도 한다. 사람은 대상이 그 무엇일지라도 사랑할 수 있다. 영화 Her를 보면 심지어 인공지능 OS랑도 사랑을 한다. 사랑의 감정이 싹트는 배경은 그 대상이 자신을 얼마나 이해해주느냐, 그 대상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위로를 받을수 있는가가 발생할 때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같다. 성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가는 그 다음 문제로, 대상을 불문하고 사랑이 시작되면 그 문제의 해결법을 찾기 시작한다.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무언가"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그것이 누구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고양이인지, 개 인지는 중요한게 아니다. 동성애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이성으로부터 느낄 수 없었던 위로와 이해를 동성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수 많은 우연과 필연의 반복으로 일궈진 결과물일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자녀를 낳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입양을 해서 자녀를 갖는 기쁨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없을까? 그 차이를 판별할 수는 있는 걸까?

인간의 유전자로 인해서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생의 목적을 달성하고 그 유전자를 돌보는 기쁨이 남의 유전자를 자신의 유전자라고 여기면서 돌보는 기쁨보다 더 크다고 가정한다면, 출생을 못하는 동성애는 어떻게 보면 전체 사회적으로 지양되어야 할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 효용적인 면에서 개인의 선택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다. 이런 사고관은 앞서 말했듯이 전체주의적, 전근대적 사고 방식으로 요즘 사회에서 중시하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과는 상충하는 문제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이런 것들을 공론화해서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알려 주고 선택권을 줘야 한다. 사랑의 대상은 네가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출생은 할 수 없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고민과 선택의 결과가 무엇이든 우리들은 너를 지지한다.

내가 이성애자인 이유는 동성애는 옳지 않다는 사회적인 맥락 아래에서 암묵적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를 교육 받은 적이 있던가? 미디어에서는 항상 남녀간의 사랑만 다루고 있는 시대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운 좋게 나를 잘 이해해주는 이성을 만났기 때문이다. 글쎄 어쩌면 지금 만나는 이성이 날 잘 이해해준다고 느끼는 것도 그냥 착각 혹은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다. 나랑 잘 맞는 동성 친구들도 많으니까.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 영화 Get Out 에서 봤던 집단 최면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최면에 걸려 있을 뿐.